이재명과 김문수에게 보인 두 모습, 교회가 아직도 이 모양이다
이재명과 김문수에게 보인 두 모습, 교회가 아직도 이 모양이다.
탄핵 정국 4개월 내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분통이 터졌다. 한국교회 상당수가 내란을 옹호하고, 대통령의 거짓말을 편들었다. 하마터면 한국교회가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뻔한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토록 분별력이 없어졌는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민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 대통령 탄핵이 결정됐다. 대법원의 정치 개입 의혹으로 잠시 큰 격동이 일어났으나 수습이 되었고, 선거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선거전이 시작되니 구태를 벗어버리지 못한 일부 기독교 세력은 참회는 못할망정 다시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국기독교단체연합과 1200개 시민·종교단체가 함께 지난 13일 국회 소통관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들이 김문수 후보 지지의 변으로 내세운 것은 사법부 독립성과 3권분립이었다. 그러나 김 후보는 비상계엄을 통해 '의회 무력화'를 시도한 윤석열을 옹호하지 않았나.
더구나 김 후보가 '차별금지법이나 학생 인권법과 같은 반성경경적 악법'을 저지할 가장 적임자라는 주장에서는 역시 해묵은 고질병이 다시 드러난다. 주류 기독교는 현대 사회에 강화된 소수자 인권과 약자 보호 정신을, 성경 몇몇 구절의 편협한 해석을 근거로 강하게 적대해왔다. 나아가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중심가치인 것처럼 일반화하고, 침소봉대하여 도리어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의 증오와 분열을 심화시켰다. 그 전조는 지난해 10.27 기독교 반동성애 집회였고, 절정은 12.3 계엄 사태 전후에 보여준 부끄러운 난동이었다.
깊은 상처와 분열을 딛고 나라를 다시 정상화하고 국민통합을 만들어가려는 이 중대한 길목에서, 일부 기독교 세력은 조금의 사과나 반성도 없으니 통탄할 일이다.
정치와 종교, 관계 다시 설정해야
지금이 무너지고 병든 대한민국의 모든 기초를 다시 쌓아야 할 중대한 시점이라면, 정치와 종교의 관계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첫째, 현실정치 앞에서 종교(인)는 쌍둥이도 후견인도 아니고, 예언자다. 구약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는 예언자라는 아주 독특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사장 같은 정통 종교인이 아니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자기 사명으로 알았다.
이들은 왕의 관료가 아니었지만, 왕실을 넘나들며 때로는 응원, 때로는 신랄한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다. 왕의 입장에서는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하기엔 참으로 곤혹스럽고 불편한 존재였다.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추앙되던 다윗조차 예언자로부터 든든한 지지는 물론 살벌한 경고와 저주도 꼼짝없이 들어야 했다.
교리를 떠나 우리에게 종교(인)의 자리는 무엇인가? 인류와 사회가 끝까지 고수해야 할 원칙과 기초를 밝히고, 하늘을 대리하여 가장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가려진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어야 할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시대와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터를 지키고, 자본과 권력의 침탈을 막기 위한 둑과 같은 존재다.
둘째, 비판적 지지는 '비판'과 '지지'를 동시에 붙드는 힘겨운 긴장이다.
정치는 그저 이상이나 막연한 꿈이 아니라 현실 권력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선거에서 여러모로 견주어 단 1%만 나아도 지지하고, 선택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중요한 선거마다 각 종교단체나 성직자의 다양한 지지 선언들이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그들은 특정 정당과 후보에 대한 맹목적, 일방적 지지가 아니라 감시와 질책을 전제한 비판적 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지지했던 정당과 정치인의 잘잘못을 따져가며, 공정한 평가를 계속하는 종교인을 본 적이 없다. 비판적 지지라면서도 '비판'은 사라지고, 늘 일방적 '지지'에 머물고 만다. 선거를 거듭해도 그러한 습성은 변하지 않고, 종교(인)가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응원단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가 정말 잘되기를 바라고, 누군가를 지지한다면 힘들어도 비판을 멈추지 말라.
셋째, 종교인이 교회와 쉽게 동일시되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권 때문이든 정의 때문이든, 교회는 정치와 하나 되면 안 된다. 그 말이 종교(인)가 정치에 무관심 하라거나 기독교인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종교(인)는 늘 정치를 깊이 알고,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모든 정치적 사안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표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목사는 여전히 교회의 대표자이므로 목사의 정치적 발언은 최대한 절제되고, 교회나 기독교를 과대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목사가 현실 정치의 책사 역할을 자임하거나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 정파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교회는 좋은 시민과 좋은 정치인, 각 영역의 훌륭한 전문인을 길러내는 모판 역할을 해야 한다.
넷째, 섣부른 예단을 조심하라.
최근 등장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자'는 기독인 선언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려고 한다. 사실 이재명 후보는 윤석열 정권 내내 가장 많은 탄압과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 또한 윤석열 정권과 야합하던 주류 기독교의 깊은 혐오와 악마화의 대상이 되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이재명 후보가 받은 부당한 상처와 아픔에 미안하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후보를 향한 공개적 사과라는 형식은 뭔가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한다.
더구나 그러한 미안함의 표명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야당 대표를 맡아온 정치인 이재명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가로막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윤 정권과 일부 언론의 부당한 공격이 있었다고 해서, 그의 정책과 정치활동에 제기된 정당한 의문과 평가조차 같은 취급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제 그는 한 정당 대표를 넘어 유력 대선 주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명문에서 "이재명 후보가 꿈꾸는 대동 세상이 성경의 하나님 나라와 맞닿아 있다"는 표현은 섣부르고, 과도하게 느껴진다. 성공을 소망하는 것과 성공을 미리 예단하여 선포하는 것은 다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주목받으며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 없는 세상' 구현에 대해 역설한 명연설과 더불어 재임 첫해인 2009년 돌연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아직 그가 세계 평화를 위한 그 어떤 활동과 성과도 이뤄내기 이전에 말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그는 재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한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재명 후보가 당선된다면 진심으로 그의 성공을 기대한다. 그러나 기대가 클수록 찬사만 쏟아내는 '팬클럽'의 역할을 할 게 아니라, 응원과 함께 쓴소리도 잊지 않는 비판적 견인으로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본다.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가 다시 제 궤도에 들어서야 한다. 더불어 한국 사회의 퇴행에 큰 책임이 있는 우리 기독교회가 깊이 참회·자숙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날 각고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이러다간 정치도, 종교도 함께 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와 종교 사이의 관계 설정은 항상 쉽지 않다. 정치와 종교가 타락하고 병들면, 항상 서로 하나가 되어 절대권력을 탐한다. 정치는 현실 권력을 추구하며 그것을 장악하지만, 늘 사회적 명분과 국민적 정당화를 바란다. 그들에게 국민 상당수의 의식과 문화를 좌우하는 주류 종교의 지지는 도덕적 명분을 얻는 것이므로, 종교를 정치 영역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이전과 같은 절대적 권위를 상실한 종교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추된 자신의 위상과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의 본질과 민심에 더 주의하기보다는 법과 권력을 추구하고 정치에 밀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정치도, 종교도 함께 망하는 길이다.
그렇게 탈선한 정치와 종교가 동반 추락하게 된 사건이 이번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이다. 다행히 그 추악한 음모는 일단 실패했지만 정치의 종교화, 종교의 정치화는 언제라도 다시 시도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